전쟁과역사 겨울전쟁 [2] -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었던 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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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817회 작성일 16-02-0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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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대한 패전국들의 욕심



제1차 대전 발발과 동시에 제일 먼저 주먹을 섞었던 소련(러시아)과 독일은 모두 종전 후 패전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쟁에서 한쪽이 패전국이면 다른 한쪽은 승전국이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만 역사에 이들 모두는 패전국으로 기록되었다. 전쟁 개시부터 많은 피를 흘리며 열심히 싸웠음에도 정작 가장 중요한 막판에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 강화하며 빠져나간 데 대한 일종의 인과응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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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전 종전 후 변화된 유럽의 모습.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 많은 신생국들이 옛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에 등장하였다. <출처: (cc) Fluteflute (talk) Map_Europe_1923-fr.svg: Historicair at Wikimedia.org>



제1차 대전의 종전은 역사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몰락이 시작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결과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신생 독립국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허울 좋은 문구와 달리 민족자결주의는 철저하게 승자의 논리에 의해서 패자에게만 그 의무가 강요된 원칙이었다. 즉,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같은 승전국들은 그들의 정권과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였던데 반하여 패전국들은 정권이 붕괴되고 식민지 및 영토를 상실하였다.

특히 그런 변화가 심하였던 곳이 동유럽이었는데, 전후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이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옛 지배 지역에서 탄생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패전국이라는 멍에를 썼기에 어쩔 수 없이 영토를 빼앗겼지만 힘을 회복하면 반드시 되찾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전쟁 전 강대국이었던 독일과 소련의 집념은 대단하였고 결국 이는 제2차 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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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치히(Danzig) 점령 후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히틀러와 환영하는 독일계 주민들. 고토 회복을 명분으로 시작한 독일의 폴란드 침략은 인류사 최대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결국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대전이 발발되었다. 이때 독일이 내세웠던 전쟁 개시의 명분이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바다로 향한 길을 열어주기 위해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나누어 버린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Free city of Danzig)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제2차 대전이 시작된 명분은 독일의 고토 회복 의지와 관련이 많다. 그런데 독일의 이러한 땅따먹기 야심에는 소련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소련의 야욕



독일 못지않게 소련도 제1차 대전 후 상실한 영토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소련은 밀약을 맺어 1939년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다 된 밥에 숟가락 놓듯 폴란드의 절반을 획득한 소련은 곧바로 다음 먹잇감으로 발트 3국을 지목하였다. 소련은 폴란드 침공 중 이들이 적대적 행위를 보였다며 트집을 잡는 것으로 도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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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10일, 에스토니아에 진주하는 소련군. 교전이 없었다 뿐이지 소련은 약소국을 협박하여 명백한 군사적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다.



결국 최후통첩을 내리며 겁박하여 그해 10월 군을 주둔시켜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은 1940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독립한 지 20년 만에 소련에 강제합병 당하였다. 극동에서 있었던 할힌골 전투1)(Battles of Khalkhin Gol)를 시작으로 연이어 군사적 승리를 거두며 자신감을 얻은 소련은 이제 시야를 북부의 핀란드로 돌렸다. 소련에게 핀란드는 폴란드나 발트 3국처럼 단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회복할 곳으로 보였다.

그동안 대외 도발을 하면 서방이 반발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두려움을 가졌던 스탈린은 정작 국제 사회가 아무런 제지를 못하자 점차 대담해졌다. 발트 3국의 협박에서 재미를 보았던 것처럼 소련은 먼저 외교적 공세로 도발을 개시하였다. 10월 16일, 핀란드가 모스크바로 보낸 사절 파시키비(Juho Paasikivi)에게 몰로토프는 카렐리야 지협(Karelian Isthmus) 할양과 항코 반도에 소련군의 주둔을 허용하라는 무례한 요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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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16일 모스크바에서 협상을 마치고 헬싱키로 돌아온 핀란드 대표단. 이들은 소련의 무례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명분은 핀란드와 가까운 레닌그라드의 방위를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구실이었다. 대신 라도가(Ladoga) 호수 북쪽의 일부를 주겠다고 하였지만 소련의 요구는 핀란드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협박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핀란드의 태도에 소련은 당황하거나 난감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외교적 협상으로 목적을 이룰 것이란 기대를 하지도 않았었다. 협상은 명분 쌓기 용이었고 그냥 힘으로 두들겨 버리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핀란드의 전력



이미 오래 전부터 소련의 위협을 감지했던 핀란드는 나름대로 방어 계획을 준비하고는 있었다. 지난 내전 당시에 활약하였던 72세의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을 현역으로 복귀시켜 핀란드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방어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였다. 그는 소련과 핀란드의 국경이 1천여 킬로미터가 넘지만 험난한 곳이 많아 소련군이 한정된 돌격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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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위험이 고조되자 72세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핀란드군 총사령관에 부임한 만네르하임이 1939년 8월 비푸리에서 훈련을 참관하고 있다.



따라서 만네르하임은 가장 중요한 침공로로 예상되는 전략적 통로인 카렐리아 지협에 구축된 기존의 방어시설을 더욱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만네르하임선(Mannerheim Line)으로 불린 이 방어선의 보강에 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소련의 야욕이 점차 노골화되기 시작한 1939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10만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유사시 즉각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총동원 태세를 계속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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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리아 지협에 설치된 만네르하임선은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 저항의 기반이 되었다. <출처: (cc) User Jniemenmaa on en.wikipedia at Wikimedia.org>



핀란드의 노력은 그야말로 거국적이었다. 지난 내전 당시 만네르하임이 이끈 백군에 궤멸 당하고 음지로 숨어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해외에 사는 핀란드인들까지 자원입대 행렬에 동참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핀란드군은 10개 사단과 2개 전투단으로 확충되었고 만네르하임은 이 중 가장 전력이 우수한 6개 사단으로 카렐리야 지협군(Army of the Isthmus)을 편성하여 만네르하임선을 담당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처럼 방어선을 강화하고 병력을 충원하였지만 당시 핀란드군의 전력은 총 15만 명의 병력에 30여 대의 전차, 100여 기의 항공기만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갑자기 충원된 병사들을 동일 화기로 무장시키지도 못하였을 만큼 중구난방이었고 대부분의 중화기는 구닥다리였다. 급하게 제작하거나 외부에서 도입할 수 있는 무기를 모두 끌어들인 결과였다. 하지만 이것이 인구 350만에 불과한 소국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소련의 전력



소련은 25개 사단을 동원하여 1,200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에 골고루 배치하였다. 핀란드군의 3배가 넘는 55만의 병력은 핀란드 성인 남성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력 격차는 그 이상이었다. 소련은 이들을 2,500여 대의 전차 및 2,000여 문의 야포로 중무장시켰고 하늘에서 500여 기의 항공기가 호위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닭을 잡기 위해 소 잡는 칼을 동원한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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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메이데이에 모스크바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소련군 기갑부대. 외형적으로 당시 소련군은 250만의 상비군을 보유한 군사대국이었다.



그런데 소련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워낙 전력이 압도적이어서 이런 문제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지만 겉으로 드러난 하드웨어와 달리 소프트웨어에서 상당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지휘 체계는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이 거대한 군대를 지휘할 제대로 된 지휘관들이 없다시피 하였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1937~1938년 사이에 있었던 피의 대숙청이었다.

스탈린이 독재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10여만 명에 이르는 장교들을 처형 또는 유배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지휘 계통에 공백이 심했다. 때문에 단지 당성과 충성심만 강한 하급 장교들이 초고속 승진하여 지휘를 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렇다 보니 당시의 소련군은 배치부터 문제가 많았다. 단순히 국경에 일렬로 부대를 배치하다 보니 굳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까지 전력이 분산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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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그저 압도적인 전력을 길게 분산배치하여 진격할 생각이었다. 특별히 다른 대안이나 전술은 없었다. <출처: (cc) Jniemenmaa at Wikimedia.org>



다시 말해 소련은 유능한 지휘관이 부재한 상태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단지 병력만 믿고 무턱대고 진격하는 방식으로 핀란드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소련은 양면전쟁을 하여야 했던 폴란드와 국토도 작고 국방력도 전무하다시피 하였던 발트 3국의 점령에 너무 쉽게 성과를 거둔 나머지 자신의 약점을 모르고 있었다. 반면 구 러시아제국군 출신인 만네르하임은 소련군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 지대인 할힌골 강 유역에서 소련군과 몽골군이 일본 관동군 및 만주국군과 교전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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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발행201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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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 지대인 할힌골 강 유역에서 소련군과 몽골군이 일본 관동군 및 만주국군과 교전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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